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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소개 생애 명월

by Jiniechoi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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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1506년 ~ 1567년 
황진이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입니다. 중종, 명종 때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중종 때 개성의 황 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고 합니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습니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습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습니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오는데,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합니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습니다.

 

생애

황진이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고, 아버지는 황 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고 있습니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합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고, 황진이라는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측하는데,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본명이 ‘황진’이고 접미사 ‘-이’가 붙은 이름이 전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 가능성은 옛 조선 여성들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은데,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었다는 설과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황진이가 15살 때,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동네 청년이 혼자 연모하다 어머니 진현금을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남성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죽은 남자의 상여가 황진이가 살던 집 앞을 지날 때 집 앞에서 멈춰서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속적삼을 상여 위에 올리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황진이는 여느 평범한 여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해 기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는데,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한 번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승려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의 석학의 한 사람이던 서경덕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그에게서 당시를 배웠다고 합니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또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 등으로도 유명합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해집니다. 뛰어난 시, 그림, 글씨 재주와 함께 성리학과 고전에도 능하였으며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유명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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