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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소개 생애

by Jiniechoi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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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1443년 ~ ?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도적떼의 우두머리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몇몇 문헌에 그의 행적에 대해 간략히 적혀 있습니다. 홍길동은 1443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에서 경성절제사 홍상직과 관기 옥영향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로 알려져 있으며, 조부는 밀직부사 홍징이며, 이복형은 홍귀동, 홍일동이라 합니다. 그는 조선 연산군 때 도적떼의 우두머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 인물이며, 선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홍길동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존재하는 외척 출신 도둑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탐관오리를 징치 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생애

장성군 주장에 의하면 홍길동은 1443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1510년경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빙성이 없는 이유는, 홍길동의 친아버지인 홍상직이 1424년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으로 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우의정 이극균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확인 가능한 사실은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며, 그의 출생 및 처단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라는 홍상직의 죽음에 대해 실록에는 1424년경으로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조선 후기 학자인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을 근거로 그의 출생을 추론하면 최소한 그의 아버지 홍상직이 세상을 떠난 1424년경 보다 20여 년 지난 1443년경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1500년 잡힌 기록이 있으니, 대략 89세~130세까지 살다가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장성군의 주장에 따르면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이 1423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고향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하다 1424년경 죽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며, 이후에도 홍상직은 20여 년간 더 살다가 한동안 전라도 장성현에 머물면서 관기 옥영향을 취하여 1443년경 홍길동을 얻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실록에 실려 있는 홍상직의 거주지나 사망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이복형이라는 홍일동도 절제사 홍상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세종, 세조 연간의 문신으로 인물 또한 뛰어나 꽤 유명한 인사로 그의 딸은 조선 성종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그는 행상호군으로 선위사가 되어 홍주에 갔다가 과음으로 1464년 3월 13일 죽었는데, 과연 홍일동을 홍길동의 이복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 연대가 40여 년 차이가 나아 서로 맞지 않아 회의적입니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홍길동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처음 충청도 충주 일대였고, 일반 도둑들처럼 산중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약한 흔적은 없습니다. 홍길동은 정 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마음껏 활보하면서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상관을 자칭하기 쉬웠던 것은 그의 이복 형인 홍일동이 실제로 당상관이었기 때문이며 형의 관복을 입고 당상관을 자칭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러한 기세에 눌린 지방의 권농,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등도 알아볼 정도였고, 일반 백성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조정은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습니다. 또 조정에서는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합니다.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다가 옥사당했습니다. 또한 이에 연루된 권농, 이정 같은 지방 관리들을 변방으로 유배당합니다.
조선 시대 얼자였던 홍길동은 당연히 양반의 갓을 쓸 수 없었습니다. 홍길동과 같은 도당으로 여겨져 옥사한 엄귀손은 당상 무관으로 본래는 노복과 재산이 없었는데, 한양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천 석에서 4천 석이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홍길동과 서로 내통하였던 듯 보입니다. 따라서 당상무관 신분이었던 엄귀순의 행적이 실록에 꽤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설에서와 같이 당상관 가문이었으면 기록이 있었겠으나 그 정도 고위층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홍길동이 현재의 황해도 일대인 서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1425년 생이든 1443년 생이든 간에 무조건 50살을 넘긴 나이의 도적이었기 때문에 홍길동전의 소년 의적인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도적 활동을 할 당시 노인이었습니다. 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도적 홍길동의 체포 사실을 임금에게 처음 보고합니다. 1500년 10월 28일 의금부에서 당상관 엄귀손이 홍길동으로부터 음식물을 받고, 가옥을 구입해 주고, 산업까지 경영해 주었음이 밝혀져 추포한 다음 곤장 1백대에 3천 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을 회수하겠다고 상주합니다. 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사 이외에 어떻게 처벌, 처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연산군 일기가 시대 상황 탓에 약간 누락된 부분이 많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점입니다. 다만 훗날 조선 선조 때 홍길동과 같은 강상죄로 잡힌 이연수의 처리를 논하면서 홍길동의 예를 들어 도당을 나누어 가두고 심문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옥중에서 서로 말을 맞추었거나 일부는 탈옥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 그를 처단이나 사망에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처벌이 힘든 이유는 홍길동의 조카가 숙의 홍 씨였기 때문으로 홍길동이 선대 임금의 후궁의 숙부였기에 단순 노략질 정도로는 처벌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 후 홍길동의 전례는 조정의 조세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쳐 1513년 호조가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을 위한 측량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려우니, 금년에 먼저 이 두 도의 전지를 측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양전은 중대한 일이라 본디 해야 하나, 어찌 폐단 되는 일이 없겠는가!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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