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330년 ~ 1395년
최무선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겸 정치가입니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화약 무기를 만드는 관청인 화통도감에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 불화살 등 여러 종류에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적이 칩입했을 때 사용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생애
최무선은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영주(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에서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았으며, 병법 논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화약 무기에 관심을 가져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중국어에도 뛰어났습니다.
문하부사의 벼슬까지 지낸 그는 당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화약과 총포만한 것이 없다며 화약 제조에 관심을 가졌고, 왜구를 무찌르는 데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일찍부터 화약 제조법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화약과 화포 제조에서 유황, 숯과 함께 꼭 필요한 염초는 화약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는데, 당시 원, 명 왕조에서는 화약의 제조 방법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이 기술을 아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최무선은 원의 강남 이원을 통해 화약 제조에 관한 몇 가지 비법을 전해 들을 수 있었고, 집에서 부리던 종 몇 명에게 그 기술을 배우게 해서 효과를 시험해 보고 난 뒤 최무선은 도당에 자신이 화약을 만들었다며 시험해 볼 것을 건의하였지만, 도당에서는 최무선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무선을 사기꾼이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건의한 끝에야 우왕 3년(1377년) 10월, 성의를 인정받아 화통도감(화약국)이 처음으로 설치되었습니다. 화통도감의 제조로서 최무선은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 석포, 화포, 신포, 화전, 화포, 화통 등의 총포류를 개발하고, 화전, 철령전, 피령전 등의 발사용 화기, 기타 질려포, 철탄자, 천산오룡전, 유화, 주화, 촉천화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전함 개량에도 힘을 쏟았고, 또한 화기 이용에 대한 교육에도 힘써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이는 화통방사군이 편성되었습니다.
동왕 6년(1380년) 왜구 선단 5백 척이 진포에 출몰, 서천과 금강 어구까지 올라와 주변 지역에 대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임명되어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배편으로 출항, 처음으로 화통, 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했습니다. 이때 그는 부원수로 군사를 분편할 때 최칠석 등을 이끌고 진포에서 고려군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때 진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500척을 모두 불살라버렸고, 타고 온 배를 잃어 퇴각로가 막힌 왜구는 곧 한반도 내륙을 돌며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운봉에 집결한 왜구는 다시 병마도원수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황산에서 궤멸되어 그 세력이 전에 비해 크게 꺾였습니다(황산대첩). 태조실록에 실린 졸기에서 사관은 "이로써 왜구가 차츰 줄고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잇따르며, 바닷가 백성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덕분이라 하나 무선의 공 또한 적지 않았음이다."라고 최무선의 공적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동왕 9년(1383년) 왜구가 다시 남해의 관음포에 상륙하자 최무선은 부원수로 출정하였고, 이 전투에서도 화기를 써서 왜선을 격침시키는 공을 세웁니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로 화약 병기의 사용은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두 번의 해전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 조정은 창왕 1년(1389년)에는 왜구의 본거지로 알려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최무선 또한 출정해 포로로 끌려간 백여 명의 고려인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왕 14년(1388년)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이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이듬해인 창왕 1년(1389년) 조준 등의 주장으로 화통도감은 혁파, 군기시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더 이상 무기 제조가 필요없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은 화약 무기의 보급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걱정한 때문이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연 공양왕 4년(1392년) 7월, 이방원의 건의로 최무선은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 겸 판군기시사가 됩니다. 그때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습니다.
태조 4년(1395년) 4월 19일에 사망. 태종 1년(1401년) 조정은 그가 세운 공을 참작하여 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을 추증하였습니다.
화포
최무선이 만들었다는 화포의 이름은 태조실록에도 실려 있지만 최무선 당시의 화포는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화포로 알려진 것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늦어도 세종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희고소총통으로, 길이 24센티미터의 이 총통은 현재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경희고소총통의 경우 포신의 약통이 둥글고 약실과 부리의 접점은 지름 12.5센티미터인데 비해 부리 끝은 16.2센티미터로 부리에서 약실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세종조 병기 개혁 이전의 총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