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기원전 58년 ~ 기원전 18년
고구려의 초대 군주. 묘호와 시호는 고구려본기에는 시조'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태조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뒤에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 따로 있다는 점도 동명성왕의 호칭인 태조가 묘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름은 주몽으로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본래의 성은 해였다가 건국 후 고로 고쳤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추모, 중모, 중해, 상해, 도모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습니다.
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생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하며, 즉, 천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의식이 의인화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어여쁜 세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연못 안에 세 처녀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였고, 훤화 · 위화는 돌아갔으나 유화는 해모수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백이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하백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어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본 뒤,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여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었으나, 여전히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아니하였던 하백은 꾀를 써서 해모수를 다시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가죽부대에 들어 있던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 보내었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 깨버린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홀로 승천하였습니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크게 노하여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를 만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향하여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는 기이한 일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그녀는 잉태하였고 유화가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어 유화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소중히 하였습니다. 그 뒤 금 와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피해 가자, 이번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두었습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고, 때문에 금와는 도끼로 알을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온전하였습니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습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습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에 이릅니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어별성교라 일컫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 등 금와왕의 일곱 아들이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습니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의 둘째 딸 (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소서노라고 되어 있습니다)과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고'씨로 전해지지만 주몽의 원래 성씨는 아버지인 해모수에 따른'해'씨이며,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씨가 집권하자 정통성을 위해 시조인 주몽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송양국’이라고도 합니다)의 왕 송양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습니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입니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습니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