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536년 ~ 1584년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입니다.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입니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그의 업적은 성리학에서의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5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 씨와 재혼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라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공납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는 향약의 보급에 참여하는 한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혼란해진 사회를 개혁할 방법으로 다시 건국 초기와 같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경장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로 추앙되며,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생애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12월 26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의 오죽헌에서 덕수 이 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 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6세에 어머니를 따라 한성으로 이사한 후, 어머니로부터 기본적인 학문을 배웠으며, 나머지는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여 학문을 이루는 데 뜻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이는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3년간 시묘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도 했으나, 20세에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이는 유학에 대한 열망으로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일손, 정여창 등에게 사사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의 고전을 탐독하여 박학다식한 학자로 성장합니다. 이이는 23세에 생원, 26세에 진사가 되었고,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이이는 재임 중에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의 자치와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1568년에는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때 명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이는 1575년 이조판서에 임명되면서 조선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시무육조와 십만양병설 등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안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의 미래를 위한 그의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이는 1584년 1월 16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이의 죽음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의 광주향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이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은데, 이이가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자,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그의 손을 잡고 덕수궁을 찾아갔고 이이에게 "이제 너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 네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부모님을 공경하고 둘째,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셋째, 백성을 사랑하라."라고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이이는 어머니의 당부를 마음에 새기고, 평생 동안 그것을 실천하였다 전해집니다. 그는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였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이의 이러한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