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였으며, 한성 출신이었습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남도수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습니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 1581년 발포 수군만호가 되었다가 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6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부임했고,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선조 20년) 9월의 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 뒤 두 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고, 그 뒤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가 되고, 절충장군, 만포진첨사,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 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습니다.
고려 때 정 5품 중랑장을 지낸 덕수 이 씨의 시조 이돈수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를 지낸 이변의 후손입니다. 외가는 초계 변 씨, 처가는 온양 방 씨(당시에는 상주 방 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습니다.
생애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 씨의 셋째 아들로 1545년 4월 28일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565년 이순신은 방 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를 준비하였습니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였다고 합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닙니다. 급제 후 1576년 12월에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고,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습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입니다. 발포수군만호 재직 중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성박은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오게 했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성박은 후임자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고,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이순신을 밉게 보았습니다. 이용은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 점검하였고,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습니다. 이용은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는데, 전라도도사로 재직 중이던 조헌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여 수정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이용은 생각을 바꾸어, 함경남도 남병사로 전근한 뒤 1583년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하였습니다. 1582년 1월 발포만호로 재직 중일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고흥군에 왔고 이때 서익은 발포진을 찾아가 군기보수 불량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습니다. 그러나 곧 복직하였고, 1583년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추천을 받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습니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습니다. 한편 그를 유심히 지켜본 병조판서 김귀영은 1579년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첩으로 주려 하여 불렀고, 그러나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느냐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3대 대첩
1592년, 한산도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상대로 전쟁의 초기에 치른 전투 중 하나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산도를 침략하였고, 조선은 어려운 . 그러나 이순신은 지혜로운 전략과 냉정한 판단으로 상대를 물리치며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전략적으로 뛰어난 두뇌와 용맹을 겸비한 위대한 장군임을 입증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1597년,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강력한 일본 함대와 맞서 또 다른 놀라운 전적입니다. 이 시기에 일본은 강력한 함대를 조선 해역으로 보내 침략을 시도했습니다. 조선의 상황은 비참했지만, 이순신은 나날이 힘겨운 전투에서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량해전에서 '거북선'을 활용하여 강력한 적 함대를 격퇴하고, 조선을 수호하는 데에 .
1598년, 노량해전은 일본의 함대와의 대결에서 이순신 장군이 획기적인 전술을 선보인 전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상처 입은 조선 해군은 더 이상의 전력을 쏟아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의 함대를 적의 최전방에 배치하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은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이순신은 자신의 지휘 능력과 용기로 역사에 길이 남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