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055년 10월 30일 ~ 1101년 10월 28일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 작가입니다. 흔히 대각국사라는 시호로 부릅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입니다.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이며, 추존왕 양헌왕의 이복형입니다. 대한불교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문종은 자신의 아들들 중 누가 승려가 될 것인가를 묻자, 그가 자원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1065년 외삼촌인 경덕국사 난원를 스승으로 하여 계를 받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요나라와 송나라를 방문, 순례하며 요 도종의 국사가 되고, 송나라를 방문해서는 각처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송나라의 고승들을 만나 강론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흥왕사, 흥원사, 해인사의 주지를 거쳐 다시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습니다.
생애
생애
1055년 9월 28일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본명은 석후, 또는 후였는데, 그의 이름자 후가 송나라 철종의 본명 후와 같은 글자라 하여, 이름 대신 자인 의천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11세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고 합니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문종은 경덕국사 김난원을 불러서 불일사 계단에서 직접 의천을 삭발하게 했습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불교승려가 된 경덕국사 난원은 의천의 외할아버지 김은부의 아들로, 의천의 외삼촌이며 원혜왕후, 원성왕후의 친정 오라비입니다.
1065년(문종 19) 왕사 난원이 의천의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고, 그 뒤 영통사에 있었으며, 13세에 우세의 호를 받고 승통이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승려가 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 율, 론 삼장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후에 경덕국사 난원이 입적하면서 그에게 법문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는 승려이면서 불교학자로 당시 고려의 불교 종파에는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원융종, 선적종이 있었는데, 의천은 평생 불교 계파와 육종 및 신라시대의 선교양종을 두루 연구하여 불교학연구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외전인 육경과 칠략 등을 해석하여, 문종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의 법호를 하사 받았습니다.
승려 활동
그는 형인 순종과 선종과 숙종의 각별한 지우를 받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요나라에도 알려져 요나라 도종 천우황제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요 도종은 그에게서 계를 받아 국사와 사자의 인연을 맺고 그에게서 법문을 배웠으며, 요 도종은 그가 고려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러 번 그에게 경책과 다향, 금백 등을 보내왔습니다.
1084년(선종 1) 송나라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 혜선, 도린 등으로 수행하게 했습니다. 의천은 몰래 제자 몇 인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배편으로 송나라에 입국했지만, 소문이 알려져 송나라 철종은 특별히 주객낭중인 양걸을 보내 의천을 수행,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의천 일행은 송나라의 밀수, 변하 등을 순례하고, 변하에 도착하여 신전에서 철종을 접견하였고, 차례로 6종중의 정정한 큰스님들이 있는 사찰을 방문, 즉 정원, 양연, 택기, 혜림, 종간 등 50여 인을 만났습니다. 이후 송나라 철종이 영접하여 계성사에 있게 하고, 화엄 법사 유성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 천태 양교의 판교동이, 유묘의 뜻을 문답하였습니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을 두게 하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습니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습니다. 흥왕사 주지로 재직 중 모후인 인예태후 이 씨와 둘째 형인 선종이 승하하자 의천은 다시 해인사로 물러납니다.
헌종이 즉위한 뒤에도 융숭하게 대접받았고, 헌종은 불교의 중흥을 시도하려고 해인사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서 의천을 개경으로 오도록 했고, 헌종의 초빙으로 의천은 다시 흥왕사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생애 후반에는 송나라의 승려와 불교학자들과 서신으로 사상교류를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숙종 때 주전론을 주장하여 사회경제 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습니다. 1097년 조카인 징엄을 제자로 받았습니다. 형인 숙종은 다시 자신의 다섯째 왕자 원명국사 징엄을 손수 삭발시켜 의천의 제자로 법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1101년(숙종 6) 국사로서 활동하던 중 총지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1101년 10월 3일 고려 숙종으로부터 국사로 책봉되었지만, 병세는 깊어져, 10월 5일 문병 온 형왕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습니다.
숙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조회를 파하고 임시 공휴일로 정하였으며, 친히 다비식을 한 뒤 영골사리를 영통사 동쪽 산에 석실을 세워 안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