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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 소개 살수대첩 평가

by Jiniechoi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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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미상
을지문덕 고구려 영양왕(재위: 590년 ~ 618년) 때의 장군입니다. 수나라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친 장수로 유명하고 612년 수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요동성에서 지지부진하자 별동대 30만 5천 명을 뽑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공 하였습니다. 별동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기는 했지만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이었고, 극도의 피곤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동대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강을 건널 때 습격하여 궤멸시켰습니다. 
생몰연대부터 출신, 관직 등 살수 대첩을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입니다. 평양의 석다산에서 태어났다거나 선비족 출신의 귀화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두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을지는 ‘웃치’의 음차로서 대인과 같이 윗사람을 뜻한다거나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씨 가문에 귀인에 대한 존칭사 지를 붙인 것이라고도 하지만 역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없습니다. 원전인 삼국사기에는 ‘가문의 계보는 알 수 없고,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과 문장력도 갖추었다.’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이때의 국제 정세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이었습니다.

 

살수대첩

살수대첩
612년 1월 양제가 10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로 출병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동성 전선에서 몇 달 간 발목이 잡히자 6월, 우문술, 우중문, 설세웅, 위문승 등 30만 5천 명의 아홉 군을 별동대로 조직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하게 하였고, 별동대는 100일 치 양식, 무기, 옷감 등 온갖 물자를 지고 행군을 시작했지만, 병사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몰래 버리는 바람에 고작 압록강에 닿았는데도 식량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며 수나라군의 군영에 들어가 그 형편을 엿보았고 만약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양제의 밀지를 받았었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종군하고 있던 유사룡이 말린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내 후회한 우중문이 다시 오라는 것을 을지문덕이 무시하자 수나라군의 정예기병이 추격해왔고, 이에 싸울 때마다 지고는 우중문에게 희롱하는 시를 보냈다고 합니다.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다시 회유하기에 약 올리듯 영채를 불태우고 철수했습니다. 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군량도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우중문이 지금 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볼 수 있겠냐고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우문술도 언성을 높였으나, 이전에 양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으니 그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하였기에 부득이 따랐다고 합니다. 압록수를 건너 몰려오는 수나라군을 을지문덕이 막으려 했으나 하루에 7번 겨뤄 모두 지는 등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승리에 도취한 수나라군은 계속 진격하여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고 합니다. 사실 모든 것은 을지문덕의 기만에 의한 유도 작전이었고 수나라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일부러 달아났던 것이었습니다. 수나라군은 지칠 대로 지쳐서 다시 싸우기가 힘들었던 데 반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했으며, 을지문덕이 우문술에게 ‘군대를 돌리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뵙겠다’고 거짓 항복하는 서신까지 보내자 수나라군은 결국 이를 명분 삼아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나라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하는 것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가다 싸우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7월, 마침내 수나라군이 살수에 이르러 반 즈음 건너자 뒤에서 후군을 공격했고, 수나라군은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여러 부대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달아나기에 급급해 하루 만에 450리 거리의 압록수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이때 왕인공이 최후의 부대가 되어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았습니다. 요동으로 되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수물자와 공성병기는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총퇴각하니 제2차 여수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평가

을지문덕은 수나라 왕조의 압도적인 힘에 맞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고구려를 이끌어 대승을 차지한 뛰어난 군사 전문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대 대한민국이 미국에 침공당했을 때, 대한민국의 한 장군이 그중 최고로 선발된 미군과 싸워만 멈추게 하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현대 미국과 비슷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다른 지역의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가력을 가졌습니다. 을지문덕은 적의 진영에 홀로 들어가 적의 캠프를 정찰하며, 죽음을 도전하면서도 아무런 걱정 없이 수나라 군에 항복하겠다고 말하며 적에 맞선 강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기개를 발휘하여 적을 속이고 조롱하는 고급 심리전을 포함하여 다양한 작전을 수행한 명장이었습니다. 적이 많을 때에도 분명히 이길 때가 왔다고 판단한 후 대결에 들어가는 판단력, 전쟁에서 이기거나 지는 것의 본질이 공급에 있다고 인식하는 정확한 진단, 적에 대한 정보를 직접 얻기 위해 목숨을 내기 위한 용기 등을 갖춘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간극 없는 희귀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이순신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며, 역사적 기록이 부족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쟁 역사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언급할 수 있는 유명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훨씬 후대인 조선 숙종은 1707년에 을지문덕에게 '청천'이라는 칭호를 주고 사우에 형사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칭호와 형사를 받은 인물로는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을지문덕은 조선 시대 이전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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