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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원효 소개 생애 설총

by Jiniechoi 202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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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617년 ~ 686년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 본관은 경주, 속명은 사, 서당 또는 신당이며, 별명은 모, 호는 화정입니다. 
그는 서곡사미, 백부논주, 해동법사, 해동종주, 서당화상, 고선대사라 불렸습니다. 
원효는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라 존칭 되었습니다. 
고려 숙종에 의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내려졌습니다. 
원효 스스로 지은 별명은 소성거사이며, 한국에서는 보통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립니다.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당대 가장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신라에서 살았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삼국통일에는 당나라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원효는 당시 많이들 읽는 모든 불경에 대해 각각 해설서를 편찬할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했고 통달해 당시 당나라 고승들이 원효대사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의 왕은 최고의 고승을 국사, 왕사로 두어 각종 정책결정에 권고를 받았었는데, 오늘날,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수입해 한국화 한 화엄사상과 더불어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평가받습니다.

 

생애

그의 어머니 조 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이 된 몸으로 집 근처인 상주 경산현 압량군의 남불지촌 율곡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조 씨는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원효를 낳았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라 불렀습니다. 그곳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이라 불렀습니다. 
원효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원효는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효는 어머니 조 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라 하였습니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습니다. 영취산의 낭지, 흥륜사의 연기와 고구려 반룡산의 보덕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습니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습니다. 원효는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납니다. 그는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고, 그는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삼계유심의 원리,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합니다.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로 돌아온 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르며 저술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뒤 원효는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습니다. 그는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에서 절필했습니다.

 

혼인과 아들 설총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 했다고 합니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 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고,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고 합니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습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는데,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해서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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