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송악의 호족 왕륭과 그 부인 한 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들을 점령해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이후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는데, 903년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했으며,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들과 나주를 재점령하였습니다.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전과들을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으며,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의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요나라가 발해를 침략하자 왕건에게 지원요청했으나 후백제와 전쟁 중이라서 도와주지 못했고 결국 발해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유린, 약탈하자 출병했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했고,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가 3년 후 고창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마침내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후 935년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 왔고, 이후 다시 신라 경순왕의 자발적인 투항이 이어졌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와 공주 왕 씨를 혼인시키고, 정승공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습니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 제도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1년 후인 936년 9월에 9만에 가까운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멸망시킵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926년부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 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 융화적인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생애
송악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그 휘하에 의탁하였고, 후고구려 금성태수를 역임했습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왕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계는 증조부 이전은 다소 불확실한데, 언제부터 그가 왕 씨 성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합니다. 증조모 진의(정화왕후로 추존)는 고구려 유민인 강호경과 강충의 후손으로 신천의 호족인 강 씨 가문이었습니다.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그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 하며 이름은 '왕건'이라 되어있습니다. 다만, 전설적인 면이 강하여 사실성은 확실치 않습니다.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 성원록, 왕대종족기에는 작제건이란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따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천 강 씨 일족은 왕건의 증조부의 외가 쪽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태조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기록한 고려편년통록에 의하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 씨는 고구려계 신라 사람인 강충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이 그녀의 증조부이라 합니다. 태조 왕건은 집안 가계상 고구려의 먼 후손에 해당됩니다.
역성혁명
궁예는 평소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했다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관심법을 근거로 그는 이미 수많은 장수들과 신하들을 죽인 상태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느닷없는 역모설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그런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인 적이 있는데, 그때 궁예는 자신이 처형한 자들로부터 몰수한 금은과 보물, 진귀한 물건, 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왕건을 보자 궁예는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이 말에 왕건은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리라." 하고는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왕건이 매우 난처한 상황에서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고, 이때 최응이 궁예의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내려와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라고 귀띔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왕건은 역모를 거짓으로 시인하게 됩니다.
'사실은 제가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왕건에게 상으로 조연을 베풀었습니다. 이어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고는 '그대는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궁예는 왕건에게 심각한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합니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 씨와 두 왕자를 살해합니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웁니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역성혁명을 도모하자고 합니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임금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고, 홍유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앙화를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를 항변하였다고 합니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신혜왕후 류 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왕건의 역성혁명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