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397년 5월 15일 ~ 1450년 3월 30일
조선의 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입니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습니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이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세종은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습니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종은 31년의 재위 치세 동안 수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으며, 역대 한국사 군주 가운데서도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이 통용되는 군주이기도 합니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만큼 세종의 치세는 현대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세종은 이순신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세종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세종대왕'으로 부르기도 있습니다.
생애
1397년 5월 15일 한성 준수방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 씨(원경왕후)의 여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습니다. 아명은 막동이고, 이름은 도입니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 씨와 혼인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습니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이 되었습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 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실록에 따르면,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왕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 후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매형인 이백강의 첩인 칠점생을 데리고 가려 하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결국 칠점생을 데려가지 못하였습니다.
세자가 조모인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불쾌해하였다고 합니다.
양녕대군은 기생 어리를 사랑하여 여러 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로 인해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며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어리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원망하였다고 합니다.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 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로 추방하였으며, 결국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고,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습니다.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세력을 숙청하였습니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으며,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4대 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