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691년 10월 28일 ~ 1756년 5월 22일
박문수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마지막 2등 공신인 분무공신으로 탕평 정권의 핵심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조선국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그의 자는 성보이고 아호는 기은이며 시호는 충헌입니다. 본관은 고령이며, 아버지는 박항한이고 큰아버지는 박태한입니다.
술자리에서 시니컬한 조크를 잘 날린다는 평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칭송받는 점은 양반도 군포를 내라고 주장하는 등 백성의 편에서 입바른 말을 잘했었기에 어사직을 단기간 수행하면서도 암행어사 설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온갖 특권을 누리는 2등 분무공신이면서도 붕당으로는 소론으로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정승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군정에 밝아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서 난을 조기에 진압했고 세정 등 경륜도 인정받았으며 저서는 탁지정례, 국혼정례가 있고 글씨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기념비인 오명항토적송공비가 남아 있습니다.
생애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에게서 수학한 그는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습니다. 1724년 설서,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에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됩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 도순문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습니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 호서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사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 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1741년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고, 1742년 병조 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1744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습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로 다시 좌천됩니다. 그 후 영남 균세사를 거쳐 판의금부사, 세손사부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인 의소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받아 제주도에 안치되었습니다. 1753년 풀려 나와 우참찬에 오릅니다. 박문수는 춘방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무신년 역변 때에 조현명과 더불어 함께 원수의 막부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 호조 양부에서 이정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연석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를 하여 거칠고 조잡한 병통이 있었습니다. 또 이광좌를 사표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평가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과 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재정 개혁을 통해 조선의 재정난을 극복하는 데 노력했으며 세금 징수의 효율성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환곡 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박문수의 재정 개혁으로 조선의 재정난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 1730년대부터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성격으로 끝내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는 소론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비판하고 당색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와는 달리 실제로 임금으로부터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은 없으며, 별견어사로만 4번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당하관이 암행어사에 임명되는데 박문수는 별견어사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 당상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