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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소개 생애 목화

by Jiniechoi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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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고려 경상도 김해부사록, 고려 한림원 순유박사 등을 거쳐 고려 성균관 대사성 직책을 지낸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입니다. 본관은 남평이고 강성 문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초명은 문익점, 자는 일신, 호는 사은 또는 삼우당입니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습니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습니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성계,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을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습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목화의 씨 몇 알을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하고 함께 이를 재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었던 한 송이가 겨우 싹을 틔웠고, 그의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을 연구해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해지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목화 재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곡의 문인입니다.

 

생애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에서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남평입니다. 문익점의 생몰년은 다소 불확실하며 태어난 해는 1331년, 사망한 해는 1400년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자는 일신, 호는 삼우당입니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은 극구 사양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 등과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1360년 문익점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 순유박사 등을 지냈습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이 되었습니다.
1363년에 좌정언으로 벼슬을 하던 중 계품사인 문하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었습니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고, 이때 연경에 도착한 그는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 등에게 패하였습니다.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가 탄로나는 바람에 강제 귀국과 동시에 벼슬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는 3년 만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냅니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 등에게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기계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습니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심었던 것은 실패하였으나, 불행중 다행히도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면서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습니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고,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입니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적을 기려 훗날 “일반 백성들에게 값 싸고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신농하고 후직씨 같다.”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문익점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뜨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하고 문영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습니다. 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로 변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1374년 그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습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해서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 전의감주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37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1383년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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