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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소개 생애

by Jiniechoi 2023.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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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1360년 8월 28일 ~1438년 10월 22일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입니다. 고려국 전의시승, 조선국 판한성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본관은 신창. 자는 자명. 호는 고불, 동포. 시호는 문정입니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입니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입니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기거랑, 사인, 우헌납 등을 지냈고,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에 나가 예의좌랑에 제수되고, 정종 때 간의, 우산기상시, 태종 때 동부대언, 이조참의,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세자의 시종관으로 다녀왔습니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세종 때는 공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냅니다.

 

생애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려 말에 관직을 역임하고 수문전제학에 이르렀던 아버지 맹희도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검교한성윤에 임명되었으며 사후 우의정에 증직 되었습니다. 그는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됩니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전의시승, 기거랑, 사인, 우헌납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 출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 했습니다.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고 합니다.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습니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태종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합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의 시관이 되어 권채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람한 문과복시에 득권관이 되었습니다. 그해 노부의 병환을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와 약을 하사 받습니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습니다.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때도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습니다. 그 뒤 1419년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습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를 지냈고,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태종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가 있습니다. 
세종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집현전 학사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합니다. 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자식에게 절을 하여 술버릇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습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정치에 있어서 예악, 즉 예의와 음악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삶을 도덕에 근거하고 인애에 의지하며 예술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악은 유교적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계였고, 그러기에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습니다. 세종 때 예악의 정비가 우의정 맹사성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지만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지만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합니다.
세종은 1433년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에 나섰고, 적 사망 170명, 포로 36명, 우마 170마리를 얻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0명에 불과한 대승리였다고 합니다. 이때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과는 달리 세종의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천했습니다.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 조직, 7개 부대에 의한 동시다발적 기습 작전 등은 모두 맹사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정벌 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에게로 돌려 그를 좌의정에 승진시켜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는 좌의정 직을 사임할 각오까지 했지만,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세종이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여진족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사성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입니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사람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 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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