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출생 : 1745년 ~ 1806년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풍속 화가로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 호는 단원, 단구, 서호, 고면거사, 취화사, 첩취옹입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 단원을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여겨지며, 그는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인물화 및 신선도, 화조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주로 어명, 고관의 명,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습니다.
생애
1745년 아버지 김석무와 어머니 문필주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하급 무관에 대대로 출사하던 무반 가문으로, 5대조 김득남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은 별제, 증조부 김진창은 만호를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조부 김수성 대부터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김홍도가 태어나던 시기에는 신분이 중인으로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습니다. 1771년에는 왕세손의 초상화를,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기에 이 시기 즈음의 김홍도가 도화서에서 갖는 입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후 1781년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 어진화사로 임명되어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789년에는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떠났는데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혼자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당시 지도는 국가기밀이었기에 그 정도 임무를 맡을 정도로 정조가 믿고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로 지정한 수원 화산 용주사의 대웅전에 화승들의 불화 작업을 감독합니다. 삼세여래후불탱화라는 그림이 걸작으로 손꼽히는데 과감하게 서양 화법을 도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들로 1795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사임했습니다. 1796년 다시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고 1797년 국가에서 발간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 학습 관련 책이나 위인전에서는 김홍도가 1760년생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생몰연도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른데, 그나마 요즘은 1745년생으로 거의 일치화되고 있습니다. 기록으로는 1805년에 병이 위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때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1810년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입니다.
김홍도는 영조, 정조 시대에 활동하며 조선의 화풍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청나라를 통해 익힌 것으로 보이는 서양 화법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드러낸 훈염기법을 도입합니다. 또한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민중들의 삶을 그려낸 풍속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으로 서당, 씨름 등이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 빨래하는 아낙 등을 그렸습니다. 이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고, 학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정조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줍니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는데,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