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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소개 생애 진주대첩

by Jiniechoi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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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1554년 9월 23일 ~ 1593년 1월 28일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왜군의 침입을 막아낸 영웅입니다.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시호는 충무입니다. 고려 때 충렬공 김방경의 13대손이자 지평 김충갑의 셋째 아들입니다 한 일화로 김시민이 8살이던 해, 마을 냇가에 큰 뱀이 출몰하여 마을의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어 궁리하다가 '뱀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 쏘아 잡는다'라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손수 만든 활로 쏘아 없애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바로 사직했을 정도로 성격이 매우 다혈질이었습니다.

 

생애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고,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습니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합니다.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는데,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 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습니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 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습니다. 김시민은 취임 후 염초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습니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고, 그 뒤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고 합니다.
진주대첩, 한 번 대패한 일본군은 진주성을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1592년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으로 습격했는데, 1부대는 마재를 넘어오고 2부대는 불 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습니다. 그런 다음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한 후, 여자는 모두 남장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퇴각시킵니다.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1592년 마지막 날의 전투를 끝낸 후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 있었던 한 왜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졌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습니다.
김시민의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승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시민의 활약 덕분에 조선은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고, 전쟁의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김시민은 진주대첩 외에도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동안 총 15회의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무예와 지략은 물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사후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에 추봉되었습니다.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고, 1702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으며, 충민사에 배향되었습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고,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습니다. 진주전상각적비라고도 하며,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습니다. 1987년 당시 전투에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의 뒷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합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 조성한 혁신도시 소재 동명인 충무공동은 김시민 장군의 호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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