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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 소개 생애 귀주대첩 느낀 점

by Jiniechoi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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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출생 : 948년(정종 3) ~ 1031년(현종 22) 
고려의 문관으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구국 영웅이자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조선의 이순신 장군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동아시아의 군사 강국이었던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었습니다. 사실 강감찬 장군은 정식으로 무관직에 봉해진 적이 없으며, 제3차 여요 전쟁 때 임시적으로 받은 상원수직은 비상설직으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30년 넘게 문관으로 근속했고 군인으로서 지낸 것은 불과 3개월에 불과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남기신 명언으로는 "호랑이의 힘이 세어 두려워하나 힘이란 언제나 지혜에 지는 법. 힘센 것이 세상을 지배하였다 하면 어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겠느냐."가 있습니다.

 

생애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이었습니다. 강감찬이라는 이름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입니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어느 날,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 걸로 유명하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로 불렸다고 합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기발한 지략들이 많았으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36세로 늦은 나이에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1009년 (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 출세길이 트였으며, 1010년(현종 1)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유일하게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1011년 국자제주가 되고,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 시 중추원사 이부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임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 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합니다. 하지만 고려가 크게 이겼으며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몇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란이 수습된 뒤 1019년에 검교태 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습니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에 1030년에 문하시중에 올랐고 1031년(현종 22년)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 후에 이르렀습니다. 1031년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죽은 후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귀주대첩 

1019년 3월 10일 고려군이 요나라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입니다. 고려 측 20만, 요 측 10만 이상의 대병력이 평야 한복판에서 맞붙은 총력전입니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이 3번째 침공이 바로 귀주대첩입니다. 먼저 흥화진 전투에서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어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합니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고려와 요나라 간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나라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그친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느낀 점 

현재 고려거란전쟁이라는 제목으로 KBS와 넷플릭스에서 관련된 드라마가 방영 중이라 강감찬 장군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이런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다들 역사를 알아야 된다고만 이야기해서 그 진의를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또한 영상을 통해 몰입하면서 나라면 어땠을까?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무엇이 맞았을까? 먼가 저를 좀 더 자세히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이 되었고 다시 한번 책, 영상, 지식, 역사 등이 왜 중요한 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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